자유 屈原(굴원)에 대하여 (3) | |||||
작성자 | 소위2영자장애 | 작성일 | 2013-12-28 19:18 | 조회수 |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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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BC 340 ~ BC 277 http://dbscthumb.phinf.naver.net/1350_000_1/20120724151937583_WFUUZNS2E.jpg/eb1_clh_24_i1.jpg?type=w209_2&wm=Y <= 굴원 사진 이름이 평(平)이고 일명 정칙(正則)이라고 하며 자는 영균(靈均)이다. 굴원은 초의 귀족 출신으로, 전국 시대 초의 중요한 정치가였고, 특히 외교에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칠웅(七雄)이 격렬히 할거하던 시기에 초(楚) 회왕(懷王, 기원전 328~299)을 보좌하였으며, 왕은 그를 매우 신임하여 나라의 대내외적인 일을 상의하였다. 당시 밖으로는 진나라와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었으며, 안으로는 보수파와 개혁파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의 대립이 심하였던 것이다. 전자는 초의 왕족들로 대표되고, 후자는 굴원이 대표였으나 마침내 정치적인 모함으로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와 같은 내정의 불안을 틈타 진나라에서는 장의(張儀)를 파견하여, 제나라와 단교한다면 600여 리의 땅을 초나라에 할양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뒤에 장의는 600여 리가 아닌 6리였을 뿐이라고 말을 바꾸자, 초는 속았음을 알고 전쟁을 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여 한중(漢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초 회왕은 굴원을 제나라에 보내어 다시 수교를 회복하게 하였다. 그러자 299년 진 소왕(昭王)은 진·초 두 나라의 혼인을 제의하며 무관(武關)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였다. 굴원은 "믿을 수가 없으니 가서는 안 된다"고 간절히 진언했으나, 회왕은 아들 자란(子蘭)의 친진책을 받아들였다. 결국 기만당하여 회왕은 진에 억류되어 3년 동안의 포로 생활 끝에 진나라에서 사망하였다. 회왕을 이어 장자인 경양왕(頃襄王, 기원전 298~기원전 263)이 즉위하였으나, 친진 세력이 더욱 득세하여 굴원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으며, 결국 그는 강남으로 추방을 당하였다. 그 후 굴원은 9년 동안 상강(湘江) 일대를 떠돌아 다니다가, 초영(楚漏)의 함락을 목격하고 비분을 금하지 못해 멱라강(汨羅江)에 투신하였다. 그의 대표작들은 그가 추방당한 뒤 강호를 떠돌아다닐 때 지은 것이다. 『한서』 「예문지(藝文志)」와 왕일(王逸)의 『초사장구(楚辭章句)』에 의하면 굴원의 작품은 「이소(離騷)」 1편, 「천문(天問)」 1편, 「구가(九歌)」 1편, 「구장(九章)」 19편, 「원유(遠游)」 1편, 「복거(卜居)」 1편, 「어부(漁父)」 1편 등 모두 25편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부」는 『사기』의 「굴가열전(屈賈列傳)」 가운데에 나오는 굴원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굴원의 작품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원유」는 한대에 유행하였던 도가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문체 또한 산문 부체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므로 한인(漢人)의 모작으로 여겨진다. 이 밖에 「구장」 중에 「석왕일(惜往日)」, 「비회풍(悲回風)」, 「복거(卜居)」 등도 후대 사람들의 모작인 듯하며, 믿을 수 있는 굴원의 작품으로는 「이소」, 「구가」, 「천문」, 「구장」 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굴원 [屈原]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2010.3.24, 다락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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