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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屈原(굴원)에 대하여 (1) - 2
작성자 소위2영자장애 작성일 2013-12-28 18:51 조회수 21
明年, 秦割漢中地與楚以和. 楚王曰:「不願得地, 願得張儀而甘心焉.」張儀聞, 乃曰:「以一儀而當漢中地, 臣請往如楚.」如楚, 又因厚幣用事者臣靳尚, 而設詭辯於懐王之寵姫鄭袖. 懐王竟聴鄭袖, 複釈去張儀. 是時屈平既疏, 不複在位, 使於斉, 顧反, 諫懐王曰:「何不殺張儀?」懐王悔, 追張儀不及.21)

이듬해에 진나라는 한중 일대를 할양함으로써 초 나라와 강화를 맺으려고 했다. 초 나라의 왕은 “땅을 얻고 싶지는 않고, 장의를 얻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오.”라고 말했다. 장의가 그 소식을 듣고서 말하기를 “저 한 사람으로써 한중 지역을 대신한다면, 신을 초 나라로 가도록 해주십시오”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초 나라로 가서, 풍성한 예물로 권신인 근상(靳尙)과 통하고, 이어 회왕의 총희(寵姬)인 정수(鄭袖)에게 궤변을 늘어놓았다. 회왕은 결국 정수의 말을 듣고, 장의를 석방시켜주었다.

이때 굴원은 이미 배척되어 다시 요직에 오르지 못했는데,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회왕에게 “어찌해 장의를 죽이지 않았습니까?”라고 묻자, 회왕이 비로소 후회해 장의를 뒤쫓게 했으나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其後諸侯共撃楚, 大破之, 殺其將唐眛.22)

그 후 제후들이 일제히 초 나라를 공략해 크게 격퇴시켰고, 초 나라의 장군 당말(唐眛)을 죽였다.

時秦昭王與楚婚, 欲與懐王會. 懐王欲行, 屈平曰:「秦虎狼之國, 不可信, 不如毋行.」23)懐王稚子子蘭勧王行:「柰何絶秦歓!」懐王卒行. 入武関, 秦伏兵絶其後, 因留懐王,24) 以求割地. 懐王怒, 不聴. 亡走趙, 趙不內. 複之秦, 竟死於秦而帰葬.

이때 진 소왕(秦昭王)은 초 나라와 인척관계였으므로, 초 회왕과 화합하고자 했다. 이에 회왕이 몸소 가려고 하자, 굴원은 “진나라는 호랑이나 이리와 같은 나라이므로 믿지도 마시고, 가시지도 않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회왕의 어린 아들인 자란(子蘭)은 왕에게 갈 것을 권하며 “어찌 진나라의 호의를 거절합니까?”라 했다. 결국 회왕은 진나라로 갔다. 그가 진나라의 무관(武關)으로 들어서자, 진나라의 복병들이 그 뒤를 차단했고, 회왕을 억류시킨 채 초 나라의 땅을 할양할 것을 요구했다. 회왕은 분노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회왕이 도주해 조(趙)나라로 갔으나, 조나라에서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다시 진나라로 갔으나, 결국 그곳에서 죽임을 당해 귀국한 뒤 장사를 치르게 되었다.

長子頃襄王立,25) 以其弟子蘭為令尹. 楚人既咎子蘭以勧懐王入秦而不反也.

그 뒤 회왕의 큰아들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했고, 그의 아우 자란은 영윤(令尹)이 되었다. 초 나라 사람들은 자란이 회왕에게 진나라로 갈 것을 권유해 돌아오지 못한 것에 대해서 질책했다.

屈平既嫉之, 雖放流, 睠顧楚國, 繋心懐王, 不忘欲反, 冀幸君之一悟, 俗之一改也. 其存君興國而欲反覆之, 一篇之中三致志焉. 然終無可柰何, 故不可以反, 卒以此見懐王之終不悟也. 人君無愚智賢不肖,26) 莫不欲求忠以自為, 挙賢以自佐, 然亡國破家相隨屬, 而聖君治國累世而不見者, 其所謂忠者不忠, 而所謂賢者不賢也. 懐王以不知忠臣之分, 故內惑於鄭袖, 外欺於張儀, 疏屈平而信上官大夫、令尹子蘭. 兵挫地削, 亡其六郡, 身客死於秦, 為天下笑. 此不知人之禍也. 易曰:「井泄不食,27) 為我心惻,28) 可以汲.29) 王明, 並受其福.」30)王之不明, 豈足福哉!31)

굴원은 그 사실을 한스럽게 여겼으니, 비록 추방당한 처지였지만 초 나라를 그리워하고, 회왕에 대해서 미련을 품어 그의 곁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기대했고, 또한 임금의 깨우침이 있어 국운의 개선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은덕이 있고 국운이 흥성해 그 허물어져가는 국운을 회복하고자, 시 한 편 속에 세 번씩이나 그 뜻을 폈다. 그러나 끝내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회왕은 다시금 돌아올 수 없었으니, 결국 이로써 회왕이 끝까지 잘못을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군주된 자는 어리석거나 현명하거나 못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충성심만을 추구해 자기를 위하게 하지만, 또한 현명한 자가 등용되어 자기를 보필하기를 원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나라와 가정을 파괴하는 자가 계속 나오고, 성은(聖恩)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대를 잇는 경우를 찾기 어려운 것은, 소위 충신은 충성을 다하지 않음이고, 소위 현명하다는 자가 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왕은 충신을 분별할 줄 몰랐으므로, 따라서 안으로 정수에게 미혹되었고, 밖으로 장의(張儀)에게 속았으며, 굴원을 멀리하고 상관대부와 영윤 자란을 신임했던 것이다. 군대는 꺾이고 영토는 깎이어, 여섯 개의 군(郡)을 잃었고, 몸은 진나라에서 객사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것은 사람을 제대로 알아*지 못해 화를 입은 것이다. 『역경(易經)』에서 말하기를 “우물물이 맑아도 와서 마시지 않는구나.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함은, 이 물은 가히 마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왕이 명철하다면, 또한 그 복을 받는 법이다.”라 했다. 왕이 밝지 못하니, 어찌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令尹子蘭聞之大怒, 卒使上官大夫短屈原於頃襄王, 頃襄王怒而遷之.32)

영윤 자란은 굴원의 태도를 듣고 격노해, 마침내 상관대부로 하여금 굴원을 경양왕에게 혹평하게 했고, 경양왕은 격노하여 굴원을 멀리 유배시켰다.
長子頃襄王立,25) 以其弟子蘭為令尹. 楚人既咎子蘭以勧懐王入秦而不反也.

그 뒤 회왕의 큰아들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했고, 그의 아우 자란은 영윤(令尹)이 되었다. 초 나라 사람들은 자란이 회왕에게 진나라로 갈 것을 권유해 돌아오지 못한 것에 대해서 질책했다.
屈平既嫉之, 雖放流, 睠顧楚國, 繋心懐王, 不忘欲反, 冀幸君之一悟, 俗之一改也. 其存君興國而欲反覆之, 一篇之中三致志焉. 然終無可柰何, 故不可以反, 卒以此見懐王之終不悟也. 人君無愚智賢不肖,26) 莫不欲求忠以自為, 挙賢以自佐, 然亡國破家相隨屬, 而聖君治國累世而不見者, 其所謂忠者不忠, 而所謂賢者不賢也. 懐王以不知忠臣之分, 故內惑於鄭袖, 外欺於張儀, 疏屈平而信上官大夫、令尹子蘭. 兵挫地削, 亡其六郡, 身客死於秦, 為天下笑. 此不知人之禍也. 易曰:「井泄不食,27) 為我心惻,28) 可以汲.29) 王明, 並受其福.」30)王之不明, 豈足福哉!31)

굴원은 그 사실을 한스럽게 여겼으니, 비록 추방당한 처지였지만 초 나라를 그리워하고, 회왕에 대해서 미련을 품어 그의 곁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기대했고, 또한 임금의 깨우침이 있어 국운의 개선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은덕이 있고 국운이 흥성해 그 허물어져가는 국운을 회복하고자, 시 한 편 속에 세 번씩이나 그 뜻을 폈다. 그러나 끝내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회왕은 다시금 돌아올 수 없었으니, 결국 이로써 회왕이 끝까지 잘못을 깨닫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군주된 자는 어리석거나 현명하거나 못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충성심만을 추구해 자기를 위하게 하지만, 또한 현명한 자가 등용되어 자기를 보필하기를 원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나라와 가정을 파괴하는 자가 계속 나오고, 성은(聖恩)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대를 잇는 경우를 찾기 어려운 것은, 소위 충신은 충성을 다하지 않음이고, 소위 현명하다는 자가 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왕은 충신을 분별할 줄 몰랐으므로, 따라서 안으로 정수에게 미혹되었고, 밖으로 장의(張儀)에게 속았으며, 굴원을 멀리하고 상관대부와 영윤 자란을 신임했던 것이다. 군대는 꺾이고 영토는 깎이어, 여섯 개의 군(郡)을 잃었고, 몸은 진나라에서 객사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것은 사람을 제대로 알아*지 못해 화를 입은 것이다. 『역경(易經)』에서 말하기를 “우물물이 맑아도 와서 마시지 않는구나. 나의 마음을 슬프게 함은, 이 물은 가히 마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왕이 명철하다면, 또한 그 복을 받는 법이다.”라 했다. 왕이 밝지 못하니, 어찌 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굴원 [屈原] (사기, 20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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