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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오
작성자 중령4용병조합4 작성일 2023-06-01 00:09 조회수 1,100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에스라 9:15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 124:7-8

 

 

포로에서 풀려나 성전을 재건하며 주 앞에 바로 살고자 하는 마당에 저들이 그 땅의 이방인들과 다시 통혼하며 죄를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에 에스라의 상심이 크다. 저가 옷을 찢고 머리를 밀고 수염을 뜯으며 주 앞에 통회한다. 이는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이방민족과의 통혼을 엄격히 금한 것을 되**게 한다.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출 34:15-16).”

 

늘 이와 같이 금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저들의 죄는 언제나 이를 가벼이 여기면서 터진다. 그러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지시는 시련과 위로는 우리 영혼을 양육하시는 방법이다. ‘이 일 후에’ 즉 이제 막 포로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중심으로 다시 주 앞에 바른 신앙을 회복하려 하는 이때에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1).” 이러한 상황은 이상하게 꼭 예배 후에 일어나곤 한다(7:11-27, 8:21-26). 그것도 페르시아의 호의로 귀환하여 새로운 희망과 찬송으로 주 앞에 바로 서고자 하는 이때에,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사 12:1).” 줄곧 느끼는 것이지만 은혜 뒤에 사탄의 훼방이 온다.

 

그건 우리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 정녕 우리가 주를 두려워하고 경외하지 않으면 예배드리고 돌아서면서 죄를 범하게 된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베드로 사도는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5-6).” 우리에게 닥치는 이러한 현상은 우리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

 

5절 이후부터 에스라는 그러한 백성을 보며 중보한다. 우리의 죄를 개괄하고(6), 지속되는 죄와 하나님의 징계를 고백한다(7). 그때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고백하고(8-10), 이를 배신한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있다(15). 죄를 인정하고 그러한 사실을 주 앞에 내어놓는 것은 주의 긍휼하심을 바람에서다. 곧 우리가 오늘의 이런저런 사회 상황을 보며, 더욱이 교회들의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주 앞에 고백하면서 아파하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라는 표현이 스물일곱 번이나 반복적으로 되풀이 되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같은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공동체의 면면을 같이 슬퍼하고 동일시하는 것을 본다.

 

누가 종종 남의 일로 너무 마음 쓰지 말고, 감정을 이입하지 말라고 하는데, 우리가 누굴 위해 기도할 때 같은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면 그게 어찌 기도로 나올 수 있을까?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느 1:6-7).”

 

곧 우리로 이 시대의 파수꾼이 되어 저들을 대신하여 주 앞에 아뢰고 고하며 이를 개선하고 주 앞에 바로 서려는 일은 당연하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단 9:11).” 죄를 고하고 이를 같이 아파할 수 있는 용기, 그 사회의 현상은 곧 성도인 우리의 수치이기도 하다. 이를 덩달아 진영논리에 빠져 욕하고 저주하고 비난하기보다 위하여 기도하고, 회개를 촉구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바울의 의도된 지적도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이를 비난하고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여 수치가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왕들과 우리의 고관과 조상들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마는(단 9:8).” 이와 같은 기도는 시대나 역사를 통틀어 모든 성도의 공통된 화두였고 역할이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3).”

 

그래서도 교회 안에서 정치 이야기로 분쟁하지 말아야 하고, 서로 이를 두고 다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오늘 본문 8절,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상기한다.

 

예수님도 일러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하면 우리 하나하나가 먼저 믿는 자로서 바로 세워져 가야 한다. 함께 휘둘리면 답이 없다. 이러할 때 우리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찬양이다. 찬송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을 드러낸다. 그래서 대중가요도 그처럼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 있다. 노래가 갖는 특징이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늘 시편을 한데 두고 같이 보는 것은 시(詩) 곧 노래가 주는 하나 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보면 시편은 모든 본문이나 어떤 사건, 상황에도 한데 어우러진다. 우리 안에 두신 참 기쁨과 소망을 시-노래는 끌어올린다.

 

오늘 본문 중반부 이후의 기도도 실은 슬픔의 노래 같다. 하나님의 영광을 돌아보고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부끄러워하게 한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짧은 성경 한 곳을 고르라면 이사야서 35장이 아닐까? 산문체이나 시 같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사 35:1-2).

 

곧 우리로 속량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 앞에 앉게 하는 것 같다. 그리고 함께 찬양한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5-6).

 

이로써 우리가 바라는 곳, 눈을 들어 바라보는 저 천국을 그리듯이 노래한다. 이를 바울의 표현에서 잠시 언급하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곧 속량하심을 받은 자들의 하나같은 찬송이다. 이사야의 노래를 마저 보아도,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8-10).

 

속량함을 받은 자들의 언어가 찬송이다. 이를 좀 나누어 보면,

 

첫째, 찬송은 우리와 상관없는 자들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시 96:2-4).

 

둘째, 찬송은 우리로 참고 견딜 수 있게 한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막 14:24-26).”

 

셋째, 찬송은 얽매였던 것으로부터 놓여나게 한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 16:25-26).”

 

넷째, 찬송은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게 한다.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67:8).

 

다섯째, 찬송은 세상의 권세로 굴복하게 한다.

 

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138:4-5).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사 24:14-15).”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 에스라의 중보기도도 가만히 소리 내어 듣다보면 찬송이 된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10, 15).”

 

이렇듯 오늘 본문에서 에스라의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정의 중보를 들으면서 찬송을, 그 찬송이 주는 위로와 회복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어서 시를 보아도,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124:1).

 

곧 하나님이 우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참고 또 기다리시며 새로운 기회와 시간을 주어 돌이킬 수 있게 하시는지…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2-5).

 

우리가 모르고 있을 때에도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 1:4-5).” 아, 왜 내게 이와 같이 넘치는 은혜로 함께 하시는 것인지…. 때론 그 사랑이 너무 과분하고 송구하여 염치가 없다. 이에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찬송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데서 흘러나온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를 노래할 때 바라게 되고 알게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18-19).” 곧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부탁하셨는지를. 이는 삶으로 그 노래가 되는 것이어서,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98:1).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우리는 남은 인생의 항해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사 42:10).” 이는 우리가 이 땅에서 뿐 아니라,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 저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누릴 영광이었다.

 

곧 우리가 누굴 위해 기도할 때, 중보가 다시 찬송이 되는 것은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 앞에 두 팔을 높이 벌리게 하는 것으로,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149:1).

 

그러할 때에 오늘 시편의 성전을 향하는 노래에서도,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6).

 

아니면 우리가 오늘 하루도 또한 어떻게 이 고단한 삶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을까?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7).

 

사냥꾼의 올무를 바울의 인식으로 다시 묵상하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9).” 곧 우리 자신이 그러하지 않던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이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하여 우리가 찬송하게 되는 이유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146:7).

 

죄악 된 우리의 현실 앞에서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우리로 주의 위로와 영생을 사모하게 하신다. 이를 시작하신 이가 이를 끝까지 책임지실 것을 믿으며,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124: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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