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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개구리 소년 사건
작성자 대령2폐병원 작성일 2016-10-13 15:13 조회수 1,004

  









영구 미제 사건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을 기억하세요?

그 날, 그 곳엔 무슨 일이 있었나.




1991년 3월 26일, 대구 달서구에 살던 다섯 명의 초등학생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소식이 끊겼다. 공식적으로는 성서 초등학생 실종 사건이지만, 주로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이형호 군 유괴 살해사건과 함께 경찰의 미흡한 수사 때문에 영구 미제가 된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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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26일, 대구 달서구에 살던 다섯 명의 초등학생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소식이 끊겼다. 사건 발생일은 기초의회 의원을 뽑는 시ㆍ군ㆍ구의회 의원 선거일로 임시 공휴일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성서 초등학생 실종 사건이지만, 주로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이형호 군 유괴 살해사건과 함께 경찰의 미흡한 수사 때문에 영구 미제가 된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5명의 초등학생이 그것도 같은 날 동시에 실종된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사건 발생 2년 후인 1993년에는 KBS 1TV <사건 25시>와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심층적으로 방영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공중전화카드, 엽서 등은 물론이고 어린이 만화 비디오테이프 등까지 대대적으로 캠페인이 전개되면서 남녀노소 대부분이 이 사건에 대해 인지할 정도였다.


당시 정부는 경찰과 군을 대대적으로 투입하여 현장 주변을 샅샅이 **고 전국적으로 수배 전단이 배포되었다. 하지만 뚜렷한 성과없이 미제 사건으로 묻히는듯하다가 사건 발생 11년 6개월만인 2002년 9월 26일에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전국이 충격에 빠졌다. 와룡산에서 도토리를 줍던 한 시민이 유골을 발견하였고, 유골을 감정한 결과 소년들은 타살당한 것으로 판정되었다.

국민일보는 구두닦이 일을 했던 한 아무개씨가 2002년 9월 28일 대구경찰청에 “2002년 7월에 30∼35세의 남자 1명이 구두를 닦으면서, 사격 중 5명의 소년이 갑자기 나타나 2명이 총에 맞아 이중 1명이 숨지고 1명은 다쳤으며,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5명 모두를 다른 곳으로 옮겨 목을 조르고 총을 난사해 죽인 뒤 매장했다.”라며 제보한 기사를 보도했다.

한국일보는 “유해발굴 현장 부근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실탄과 탄두, 탄피는 모두 80여점. 모두 반경 20m 내에서 발견됐고 특히 2점은 유해 속에서 나왔다. 특히 발굴된 5구의 유해 중 1구의 두개골에는 총알이 관통한 듯한 구멍이 왼쪽 관자놀이에서 오른쪽 귀 위 부분으로 이어져 있었다.”라고 보도하였다.

하지만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법의인류학 전공자는 “무엇인가가 두개골 안쪽으로 파고 들었으니까 매우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라며 “심한 구타를 당했고 둔기에 맞아 두개골에 골절이 일어나면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아이들의 유골을 발굴할 때도 유골을 분석하여 사인을 밝혀낼 법의학자의 도움 없이 성급하게 작업을 진행하여 현장을 훼손하는 등 실종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놓쳤다는 비난을 받았다. 특히 2002년에 유골이 발견되었을 당시 유골이 뒤엉켜있었고, 옷을 얼굴에 덮어놓은 상태였던 것에 대해 경찰은 5명의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조난당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옷으로 온몸을 덮었을 것이라고 성급한 추측을 하였고, 심지어는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까지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피해자 부모들과 와룡산 기슭에 거주하는 할머니는 “와룡산은 마을에서 멀지 않은 야산이기 때문에 불빛이 다 보이므로 절대 조난당할 일이 없다.”라고 항의하였고, 실제 1993년에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당시 성서경찰서 경감도 “와룡산은 높은 산이 아니고 엄밀하게 말하면 야산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조난당할 가능성은 없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끝내 아이들의 사망 원인조차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채 2006년 3월 25일에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되면서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영화 <아이들…>


한편으로 실종 어린이들이 흔히 ‘개구리 소년’으로 불렸는데, 이는 도룡뇽 알을 주우러 간다는 말이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고 왜곡된 것이 초기에 널리 퍼지면서 비롯된 말이다. 1992년 11월에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이라는 영화가 나왔고, 2003년에는 가수 MC 스나이퍼가 〈개구리소년〉이라는 노래를 냈다. 2005년에는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라는 소설이 출간되었다. 2011년에는 이규만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박용우, 류승룡 배우 등이 출연한 영화 <아이들....>이 개봉되었다.









개구리 소년 사건1991년 3월 26일대구직할시 달서구에 살던 다섯 명의 초등학생이 개구리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실종된 사건을 말한다. 사건 발생일인 1991년 3월 26일5·16 군사 정변 이후 중단된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하여 기초의회 의원을 뽑는 시·군·구의회 의원 선거일로 임시 공휴일이었다. 주로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5명의 초등학생이 그것도 같은 날 동시에 실종된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고, 사건 발생 2년 후인 1993년에는 KBS 1TV사건 25시SBS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심층적으로 방영되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공중전화카드, 엽서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어린이 만화 비디오테이프 등까지 대대적으로 캠페인이 전개되면서 남녀노소 대부분이 이 사건에 대해 인지할 정도였다.

당시 정부는 경찰을 대대적으로 투입하여 현장 주변을 샅샅이 **고 전국적으로 수배 전단이 배포되었다. 하지만 뚜렷한 성과 없이 미제 사건으로 묻히는 듯하다가 사건 발생 11년 6개월만인 2002년 9월 26년에 성산고등학교 신축공사장 뒤쪽의 와룡산 중턱에서 서 전국이 충격에 빠졌다. 끝내 아이들의 사망 원인조차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채 2006년 3월 25일 24시에 공소시효 15년이 만료되면서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한편으로 실종 어린이들이 흔히 개구리 소년으로 불렸는데, 이는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는 말이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고 왜곡된 것이 초기에 널리 퍼지면서 비롯된 말이다.




사건의 발달

대구성서초등학교(당시 성서국민학교)에 다니던 동네 아이 다섯 명은 1991년 기초의원선거로 인한 임시 공휴일이었던 1991년 3월 26일대구직할시(현재 대구광역시) 달서구 와룡산개구리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갔다. 아이들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으며, 부모들은 경찰서에 실종 사건을 신고했다.

사망 아동 명단

다섯 아이들은 다음과 같다

  • 김영규 (당시 11세, 4학년, 1980년생)
  • 김종식 (당시 9세, 3학년, 1982년생)
  • 박찬인 (당시 10세, 3학년, 1981년생)
  • 우철원 (당시 13세, 6학년, 1978년생)
  • 조호연 (당시 12세, 5학년, 1979년생)

생존자 명단

  • 김태룡 (당시 10세, 3학년, 1981년생)

(그는 아침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밥을 먹고 가겠다고 했고, 결국 유일무이한 생존자가 되어 버렸다.) 다만 개구리소년 관련 영상 프로그램 에서 그의 근황은 알 수 없다.(현재나이 35세)

사건에 대한 논란

유골 발견

2002년 9월 26일와룡산에서 도토리를 줍던 한 시민이 유골을 발견하였고, 유골을 감정한 결과 소년들은 타살당한 것으로 판정되었다.

하지만 범인은 끝끝내 찾지 못하고 2006년 3월 25일자로 공소 시효가 만료되어 수사가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전국민의 관심을 끌었으나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성한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1992년 11월에는 돌아오라 개구리소년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리고 2003년에 가수 MC 스나이퍼는 〈개구리소년〉이라는 노래를 내기도 했다. 2005년에는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라는 실화소설이 출간되기도 했다.

총격에 의한 타살설

국민일보에서는했던 한 아무개씨(43·대구 달서구)가 2002년 9월 28일 대구경찰청에 "2002년 7월에 30∼35세의 남자 1명이 구두를 닦으면서, "사격 중 5명의 소년이 갑자기 나타나 2명이 총에 맞아 이중 1명이 숨지고 1명은 다쳤으며,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5명 모두를 다른 곳으로 옮겨 목을 조르고 총을 난사해 죽인 뒤 매장했다." 라는 말을 했다고 제보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미흡한 수사

헛소문들

1992년 8월경찰에서는 한센병 환자들이 을 고치기 위해 아이를 유괴해서 죽였다는 소문을 믿고 한센병 환자 정착촌을 강압적으로 수사하여 한센병 환자들의 항의를 받았으며, 1996년 1월에는 김종식 군의 아버지가 아이들을 죽여 집에 묻었다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프로파일러인 김가원 씨의 고집센 주장이 있다면서 김종식 군 아버지의 집 마당화장실, 구들을 임의로 발굴하는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성급함

아이들의 유골을 발굴할 때도 유골을 분석하여 사인을 밝혀낼 법의학자의 도움 없이 성급하게 작업을 진행하여 현장을 훼손하는 등 실종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놓쳤다는 비난도 받았었다.

특히 2002년유골이 발견되었을 당시 유골이 뒤엉켜있었고, 옷을 얼굴에 덮어놓은 상태였던 것에 대해 경찰은 5명의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조난당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으로 온몸을 덮었을 것이라고 성급한 추측을 하였고, 심지어는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까지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피해자 부모들과 와룡산 기슭에 거주하는 할머니는 "와룡산은 마을에서 멀지 않은 야산이기 때문에 불빛이 다 보이므로 절대 조난당할 일이 없다."라고 항의하였고, 실제 1993년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당시 성서경찰서 주영철(가명) 경감도 "와룡산은 높은 산이 아니고 엄밀하게 말하면 야산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조난당할 가능성은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영구 미제

이 사건은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이형호 군 유괴 살해사건과 함께 경찰의 미흡한 수사 때문에 영구 미제가 된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기억할게요  1991년 3월26일 개구리소년에 죽음을 마음 깊이

세기면서 그들에 죽음을 애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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