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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三國志가알려주는 삼국지 정사 이야기5 전예 국양
작성자 대령1三國志 작성일 2015-06-16 23:04 조회수 664




전예(田豫)는 자가 국양(國讓)이고 (유주) 어양군(漁陽) 옹노현(雍奴) 사람이다.

유비(劉備)가 공손찬(公孫瓚)에게로 달아났을 때 전예는 이때 나이가 젊었으나 스스로 유비에게 의탁하니 유비가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①)

※①선주전〉에서 유비가 ‘고당령을 지내다 적에게 격파되어 중랑장 공손찬에게로 달아났고 공손찬이 유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청주자사 전해와 함께 원소를 막도록 했다’는 것으로 볼 때 191년이나 그 직전의 일로 보입니다. 전예는 가평 연간 쯤에 82세의 나이로 죽었으므로 이때는 대략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 정도의 나이에 해당합니다.

유비가 예주자사(豫州刺史)가 되었을 때(※②) 전예는 모친이 연로하다 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했다. 유비가 눈물을 흘리며 그와 작별하며 말했다.

(※②)선주전〉에 의하면 유비가 예주자사가 된 것은 조조에게 공격받는 도겸을 구원한 뒤인 194년 무렵이고, 그 뒤 여포에게 서주를 뺏기고 조조에 귀부한 196년에는 예주목이 되었습니다.

“그대와 더불어 함께 대사(大事)를 이루지 못함이 한스럽구려.” [집해1]

[집해1] 이광지(李光地) 왈, 서서(徐庶)와 전예를 머물게 하지 않았으니(보내 주었으니) 이는 선주(先主)의 대의(大義), 성덕(盛德)이다.

공손찬(公孫瓚)이 전예에게 동주령(東州令: 東州현의 현령이란 뜻이나 東州는 없음. 束州 또는 泉州의 오기.[집해2])을 맡겼는데, 공손찬의 장수 왕문(王門)이 공손찬을 배반하고 원소(袁紹)를 위해(원소의 편이 되어) 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격하러 왔다. (전예의) 무리들이 두려워하여 항복하고자 하였다. 전예가 성(城)에 올라 왕문(王門)에게 말했다.

“경(卿)은 공손(公孫, 공손찬)에게 후대받고도 떠났으니 여기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여겼소. (그러나) 이제 다시 돌아와 침범하니 경이 그저 난인(亂人)일 뿐임을 알겠소. 무릇 작은 병 정도의 보잘것없는 지혜를 가진 이[?甁之智]라도 기물(병, 즉 지혜)을 지키며 (남에게 쉽게) 빌려주지 않는 법이며 내가 이미 (이 현을 지키는 임무를) 받았소. 어찌 급히 공격하지 않으시오?”

왕문이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공손찬이 비록 전예에게 권모(權謀)가 있음을 알았으나 그에게 대임을 맡기지 못했다(중용하지 못했다).

공손찬이 패망한 뒤 선우보(鮮于輔)가 국인(國人)들의 추대를 받아 태수(太守)의 사무를 대행하게 되자(※①) (선우보가) 평소 전예를 좋게 여겼으므로(or 전예와 서로 친했으므로) 그를 장사(長史)로 삼았다. 당시 웅걸(雄傑)들이 아울러 봉기하여 선우보는 (그 중에서) 누구를 따를지 알지 못했다. 전예가 선우보에게 말했다.

(※①) <공손찬전> 등에 의하면 유우(劉虞)가 공손찬을 공격하다 193년에 죽음을 당한 뒤 유우의 종사(從事)였던 어양 사람 선우보 등이 유우의 남은 무리를 이끌고 원소와 연결해 공손찬과 서로 맞섰습니다. 그러다 199년 공손찬이 역경에서 농성하다 원소에게 패망한 뒤 선우보가 유주 여섯 군의 사무를 대행하였고 조조, 원소가 서로 대치할 때 조조 쪽으로 투항합니다.

“결국 천하를 평정할 자는 필시 조씨(曹氏)일 것입니다. 의당 속히 귀명(歸命)하여 뒷날에 화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선우보가 그 계책을 따랐으므로 봉총(封寵)을 받을 수 있었다.

태조(太祖)가 전예를 불러 승상군모연(丞相軍謀?)으로 임명하고(※②) 영음(潁陰)과 낭릉(朗陵)의 (현)령(令)으로 제수했다가 익양태수(?陽太守)(※③)로 올리니 부임하는 곳마다 잘 다스렸다.

[집해2] 전대흔(錢大昕) 왈, 東州(동주)는 束州(속주)로 적어야 한다. 이는 현(縣)의 이름으로 하간(河閒)에 속했다.
조일청(趙一淸) 왈, 東州(동주)는 束州(속주)의 오기이다.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하간군(河閒郡) 속주(束州)(현)이며 예전에는 발해(勃海)(군)에 속했다고 하였다.
진경운(陳景雲)왈, 東(동)은 泉(천)으로 적어야 할 것으로 짐작된다. 노필(삼국지집해 저자)이 보기에는 진경운의 설이 옳고 전대흔, 조일청 두 명의 설은 틀렸다. 당시 공손찬이 의거한 곳은 유주(幽州) 땅이고 어양군 천주현(泉州)이 유주에 속하며, 하간군 속주현(束州)은 기주(冀州)에 속하여 원소의 근거지이니 공손찬이 관리를 보내거나 태수를 둘 수 없다.「일통지」에서 천주(泉州)의 옛 성이 무청현(武淸縣)의 동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② 조조가 승상이 된 것은 208년의 일.

※③ 익양군(?陽郡): 《진서》지리지에서는 위문제 조비 때 여남군을 갈라 신설했다고 했으나 이 기사를 통해 익양군이 이미 조조 때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한서》주「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에 건안 ***(213년) 주군(州郡)을 대폭 정비해 우공의 구주제를 부활할 때의 군(郡)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여기에 익양군은 포함되지 않고 여기 〈전예전〉에서 이어지는 조창의 오환 공격이 2***의 일이므로, 213년-2*** 사이에 익양군이 신설된 것으로 보입니다.

언릉후(?陵侯) 조창(彰)이 대군(代郡)을 치며 전예를 상(相)으로 삼았다.(※) 군(軍)이 역수(易水) 북쪽에 주둔하자 노(虜)가 기병을 복병으로 두었다가 공격하니 군인들이 요란해져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전예가 지형에 의거하여 수레로 둘러싸 둥근 진을 치고 그 안에서 (군사들이) 궁노(弓弩)를 가득 당기고 의병(疑兵)들을 그 틈에 채워두었다. 호(胡)가 진격하지 못하고 흩어져 물러나자 이를 뒤쫓으며 공격해 대파하고 마침내 대(代)를 평정하였으니 이는 모두 전예의 계책(덕분)이었다.

※ 2*** 4월 대군, 상곡군의 오환족 무신저(無臣?)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언릉후 조창이 토벌함.〈무제기〉

남양태수(南陽太守)로 올랐다. 당초 (남양)군(郡) 사람인 후음(侯音)이 모반하고 그 무리 수천 명이 산 속에 있으며 군도(?盜)가 되어 군의 큰 근심거리였다.(※) 전(前) 태수(조만전에 의하면 동리곤)가 그 당여(黨與) 5백여 명을 붙잡고는 표를 올려 이들을 모두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전예가 (부임한 뒤) 묶여있는 죄수들을 모두 만나보고는 그들을 위유(慰諭)하고 스스로 (죄를 씻고) 새로워질 길을 열어주려고 한꺼번에 형틀을 부수고 풀어주었다. 여러 죄수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나라를 위해) 스스로 애쓰기를 원하고 이내 서로 말을 전하여 군적(?賊)들이 하루아침에 해산해 군(郡)의 영내가 깨끗해졌다. 이런 정황을 갖추어서 모두 보고하자 태조(太祖)가 그를 칭찬하였다.

〈무제기〉〈조만전〉에 의하면, 과중한 요역(한중전투에 관련된 것으로 추정됨)으로 2*** 10월에 후음이 반란을 일으켜 남양태수 동리곤(東里袞)을 붙잡고 완(宛)을 점거합니다. 남양의 공조(功曹) 종자경(宗子卿)이 후음을 속여 태수를 풀어주게 하고 구원하러 온 조인군과 힘을 합쳐 219년 봄에 후음을 격파했는데, 이 전예전〉 기사를 볼 때 전예가 219년 초 쯤에 새로운 태수로 부임해 그 잔당문제를 처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文帝) 초, 북적(北狄)이 강성해 변경의 요새를 침략하니 이에 전예에게 부절을 지닌 채[使豫持節] 오환(烏丸)을 감호하게 하고, 교위(校尉) 견초(牽招), 해준(解儁)은 함께 선비(鮮卑)를 감호하게 했다.(※①)

※ 乃使豫持節護烏丸校尉牽招解儁幷護鮮卑 :〈선비전〉에서는 '문제가 제위에 오르고 전예가 오환교위, 지절(持節)이 되어 아울러 선비를 감호하며 창평(昌平)에 주둔했다'고 하였습니다. 전예전〉의 이 글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으나, 여기서는 사역형이므로 교위를 뒤에 붙여 읽는게 좀더 자연스러운 듯 하고, 견초가 평로교위를 지내다가 이때에 사지절, 호선비교위가 된 점을 감안해[文帝踐?,拜招使持節護鮮卑校尉,屯昌平./ 견초전] 중화서국본 표점과 달리 '乃使豫持節護烏丸/ 校尉牽招?解儁幷護鮮卑'로 끊어서 풀었습니다. 한편, 진나라 이후로 사지절, 지절, 가절이 서로 구분되는데(《진서》 〈직관지〉) 이때에도 엄격히 구분해서 썼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견초의 예나 ‘使豫持節’이란 표현으로 볼 때 전예의 경우도 ‘지절’이 아닌 ‘사지절’로 읽는게 더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즉, 전예는 사지절(使持節)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 견초는 사지절(使持節) 호선비교위(護鮮卑校尉).

고류(高柳)의 동쪽으로부터 예맥(濊貊)의 서쪽에 이르는 곳에는 선비(鮮卑) 수십 부(部)가 있어 (가)비능(比能), 미가(彌加), 소리(素利)가 땅을 나누어 통어(統御)하며 각기 분계(分界)가 있었는데, 이에 그들이 함께 맹세하여 모두 중국의 시장에는 말을 대어주지 않기로 하였다. 전예는 융적(戎狄)이 하나로 되는 것은 중국에 이로운 바가 아니라 여겼으니 이에 먼저 그들을 이간질[?離]하여 각자 원수가 되어 서로 공벌(攻伐)하게 했다.

소리(素利)가 맹세를 위반해 말 천필을 (중국의) 관(官)에 보내어 (가)비능에게 공격받자 (소리는) 전예에게 구원을 청했다. 전예는 (선비족이) 서로 겸병(兼幷)하게 되어(하나로 합쳐져서) 그 해로움이 더욱 깊어질까 우려하였고 (또한) 선인을 구원하고 악인을 쳐서 뭇 오랑캐(狄)들에게 신의를 보임이 마땅하므로 홀로 정예병[銳卒]들을 거느리고 오랑캐의 정(庭)(선비족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갔는데, 호인(胡人)들 무리가 많아 (전예)군을 앞뒤로 초략하며[?] 귀로를 끊었다.

그러자 전예가 진군하여 노(虜) 로부터 10여 리 떨어진 곳에 둔영을 세우고 소똥과 말똥을 많이 모아 태우고는 다른 길을 따라 군을 이끌고 떠났다. 호(胡)는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고 (전예가) 여전히 그곳에 있다 여기다가 (전예가) 수십리를 간 뒤에야 이를 알아챘다. 전예를 뒤쫓아 마성현(馬城)에 도착하고 이를 열겹으로 포위했다.

전예는 몰래 (군장을) 엄비하고는 (휘하의) 사마(司馬)에게 정기(旌旗)를 세우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남문으로 나가게 하니 호인(胡人)들이 모두 이를 주목[屬目]하여 그쪽으로 달려갔다. 전예는 정예병을 거느리고 북문으로 나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일어나 (사마司馬의 남문 군사와 더불어) 양쪽에서 함께 발동해 노(虜)가 예상치 못하게 출군하니 노(虜)의 무리들이 흩어지고 어지러워져 활과 말을 버리고 걸어서 달아났고, 20여리에 걸쳐 이를 추격해 공격하니 시체가 땅을 뒤덮었다.(※②)

또한 오환왕(烏 丸王) 골진(骨進)이 간힐(桀?,사납고 교활함)하여 공손하지 않았으므로 전예가 새(塞)를 나와 안행(案行,순찰)하며 홀로 휘하의 백여 기를 거느리고 골진(骨進)의 부(部)로 들어갔다. 골진이 전예를 맞이해 배례하니 이에 좌우(左右,주변사람)를 시켜 골진을 베고 그의 죄악(罪惡)을 선포해 무리들을 호령했으나 무리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행동하지(반발하지) 못하고 이내 골진의 동생으로 골진을 대신하였다. 이때 이후로 호인(胡人)들이 파담(破膽,매우 놀라고 겁먹음)하고 (전예의) 위엄이 사막(沙漠)에 떨쳤다. 산적(山賊) 고애(高艾)가 무리 수천 명으로 노략질하며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에 해를 끼치자 전예가 선비(鮮卑) 소리(素利)의 부(部)를 꾀어 고애(高艾)를 베게 하고는 그의 목을 경도(京都)로 보냈다. 전예를 장락정후(長樂亭侯)에 봉했다.

(호오환)교위(校尉)로 9년을 지내며(※③) 이적(夷狄)들을 제어하여, 늘 (그들끼리) 겸병하는 것을 최억(?抑,꺾어서 억누름)하고 (그들 중에서) 강활(彊猾,강하고 교활함)한 자를 괴산(乖散,어그러지게 하고 흩뜨림)하였으며, (중국인 중에서) 도망자나 간사한 도둑(逋亡姦?) 으로 호(胡)를 위해 계책을 꾸며 관(官)을 이롭지 못하게 한 자는 모두 전예가 계획을 짜서 이간시켜(構刺攪離) 흉악하고 간사한 모책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니, 취거(聚居,모여 삶)하는 (오랑캐) 무리들이 평안하지 못하였다. 그 사업을 다 끝내지 못했으나 유주자사(幽州刺史) 왕웅(王雄)의 지당(支黨,일당)이 왕웅이 오환교위(烏丸校尉)를 겸하도록 하려고 전예가 변경을 어지럽히고 나라를 위해 사고를 만든다고 헐뜯었다. 그리하여 전예를 전임시켜 여남태수(汝南太守)로 임명하고 진이장군(殄夷將軍)의 직을 더했다.

(※②) 전예가 선비족에 의해 마성(or 마읍성)에서 포위된 사건 ? 황초 5년(224년) or 태화 2년(228년) ?
: 삼국지집해에서는 <전예전>의 이 사건을 <선비전(가비능전)>, <견초전>, <유방전> 注「위씨춘추」등에 기술된 태화 2년(228년)의 사건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마읍성이 맞냐 마성이 맞냐만을 논하고 있는데, 태화 2년껀이 비록 전예가 가비능에게 포위된 사건이긴 하나 역관 하사(夏舍)가 선비족에게 살해된 일이 계기가 되었고(선비전) 염지(閻志)의 회유나(선비전,위씨춘추) 견초의 구원(견초전) 등 외부의 도움으로 포위를 풀었다는 점 따위에서 사건경위가 서로 다릅니다. 오히려 <선비전>에 기술된 황초 5년(224년)의 사건(가비능이 소리素利를 공격하자 전예가 경기병을 이끌고 그 배후를 기각하였고 가비능이 쇄노?奴를 보내 막자 이를 격파한 사건)을 가리키며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기술한 것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③) 삼국지집해에서는 ‘황초(黃初) 연간으로부터 태화(太和) 말까지’라고 주해하였습니다. 문제 즉위(220년) 뒤에 호오환교위에 임명되어 늦어도 태화 6년(232년) 이전에 여남태수, 진이장군으로 전임된 것은 확실하나 정확히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자치통감」에서는 전예, 견초의 호오환교위, 호선비교위 임명을 황초 2년(221년) 조에 수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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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 명제) 태화(太和: 227-232년) 말, 공손연(公孫淵)이 요동(遼東)에서 모반하므로 황제가 이를 치고자 하였으나 적임자를 고르는데 어려움을 겪으니 중령군(中領軍) 양기(楊?)가 전예를 후보자로 천거했다. [1] 그리하여 전예에게 본관(本官)(→본래 관직 즉 여남태수, 진이장군)으로서 청주(靑州)의 제군(諸軍)을 도독하며(督靑州諸軍,이것 자체가 직책명이기도 함) 부절을 주어(假節) 그를 왕토(往討,가서 공격함)하도록 했다. 때마침 오적(吳賊)(→오나라)이 사자를 보내 공손연과 서로 결탁하니 황제는 적의 숫자가 많은데다 (전예의 토벌군이) 바다를 건너야 하므로 전예에게 조서를 내려 파군(罷軍)하도록 했다. [집해3]

전예는 (공손연에게 사자로 갔던 오나라의) 적선(賊船)이 곧 돌아올 것인데 해만(歲晩,연말年末)이라 바람이 세차므로 풍랑에 표류할까 분명 두려워할 것이고 동쪽으로 가면 의지할 해안이 없으므로 응당 성산(成山,산동반도의 동쪽 끝에 있는 산)으로 올 것이라 헤아렸다. 성산(成山)에는 배를 숨길 만한 곳이 없으니 곧바로 바다를 돌며 지세(地勢)를 안행(案行,순찰)하고는 여러 산도(山島,바다의 섬)에 이르러 험요지를 막아서 끊고 군사를 배치해 둔수(屯守)하게 했다. 스스로 성산으로 들어가 한무제의 관(觀,누대,누각)에 올랐다. 적이 돌아오다 과연 사나운 바람(惡風)을 만나 배가 모두 산에 부딪쳐 침몰하고 물결에 휩쓸려 해안으로 떠밀려왔고 몸을 숨길 곳이 없어 (전예가) 그 무리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당초 제장들은 모두 텅빈 땅에서 적을 기다리는 것을 비웃었으나 적이 격파되자 다투어서 그와 더불어 모의하려 하고 바다로 들어가 표류하는 적선을 끌어올릴 것을 청했다. 전예는 궁지에 몰린 적이 죽기로 싸울 것을 우려하여 이를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당초 전예를 (여남)태수로서 청주(靑州)를 도독하게 하니 청주자사 정희(程喜)가 내심 불복하고 군사(軍事)를 의논할 때 서로 어긋나는 일이 많았다. 정희는 황제가 명주(明珠,좋은 진주)를 좋아하는 것을 알았으므로 은밀히 상주했다,

“전예에게 비록 전공(戰功)이 있으나 금령(禁令)이 느슨하니, 노획한 기장(器仗,무기), 진주, 금이 매우 많았으나 모두 (군사들에게) 흩어주었고 관(官)에 납부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공(功)이 열거되지 않았다.


[1] 신 송지(松之)(→삼국지 주석자인 배송지)가 보건대, 양기(?)는 자(字)가 휴선(休先)으로 형양(滎陽)사람이며 그에 관한 일이 유엽전(劉曄傳)에 보인다. 양기의 아들 양조(楊肇)는 진나라 때 형주자사를 지냈다. 산도(山濤)의 계사(啓事) 에서 양조(楊肇)가 재능이 있었다고 칭했다. 양조의 아들 양담(楊潭)의 자(字)는 도원(道元), 차자 양흠(楊歆)의 자(字)는 공사(公嗣), 양담의 아들 양욱(楊彧)의 자(字)는 장문(長文), (양담의) 차자 양경(楊經)의 자(字)는 중무(仲武)이며, 모두 반악집(潘岳集)에 보인다.

[집해3] 장제전(蔣濟傳) 주(注)에서 사마표(司馬彪)의「전략戰略」을 인용하여 ‘태화 6년(232년)에 명제(明帝)가 평주자사(平州刺史) 전예(田豫)를 보내 바다를 건너게 하고 유주자사(幽州刺史) 왕웅(王雄)은 육로로 함께 요동을 공격하게 했다. 장제(蔣濟)가 간언했으나 (명제는) 들어주지 않았고, 전예가 거행했으나 끝내 성과없이 돌아왔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전예가 평주자사로 임명된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한 설명은 장제전 주에 보인다.

(※ 장제전 주에 있는 삼국지집해의 글입니다. 원문은 생략합니다 / 조일청(趙一淸) 왈,,경초 2년(238년)에 공손연을 멸하고 비로소 요동, 창려, 대방, 현도, 낙랑의 다섯 군으로 평주를 두었고 뒤에 다시 유주에 합쳤으니, 태화 6년에 평주자사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전예는 이때에 호오환교위, 지절로 창평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평주자사는 아니었다. 홍량길(洪亮吉) 왈,,「진서」지리지에서 후한 말에 공손도가 평주목을 자칭하였고 위나라 때에 요동, 창려, 현도, 대방, 낙랑의 다섯 군을 평주로 삼았다가 뒤에 다시 유주로 합쳤다고 하였다. 사종영(謝鍾英) 왈,,요동의 다섯 군은 공손연이 의거한 곳이니 전예는 (실제로 부임해 다스리진 못하고) 멀리서 평주자사를 겸했던 것 뿐이다. 공손연을 평정한 뒤에는 일찍이 평주를 다시 둔 적이 없고「진서」지리지가 오기하였으니 홍씨(→홍량길)가 이를 거론한 것은 잘못이다. 심가본(沈家本) 왈,,이때 전예는 실로 평주자사가 아니었고 또한 호오환교위도 아니었다. 이 주(注)에서 (平州刺史田豫 중의) 平(평)은 幷(병)으로 적어야 한다. 전예가 뒤에 병주자사(幷州刺史)가 되었으므로 여기서 추서(追書)했을 뿐이다. 노필이 보건대, 전예전에 의하면 전예는 여남태수가 되고 본관(本官)으로서 청주의 제군을 도독하였다.「자치통감」에서도 또한 ‘여남태수 전예로 하여금 청주의 제군을 도독하며 바닷길을 통해 공손연을 치도록 했다’ 하였고 ‘평주자사를 보냈다’(遣平州刺史)고는 하지 않았다.)

전예가 주하(周 賀) 등 오나라 사절단을 요격한 것은 232년(위나라 태화 6년,오나라 가화 원년)의 일입니다.(명제기에 의하면 10월, 오주전에 의하면 9월) 이무렵 오나라는 위나라 배후견제, 군마구입 등의 목적으로 요동의 공손씨와 꾸준히 접촉을 시도했는데, 232년 3월 주하, 배잠을 요동에 파견하고 공손연의 사절과 함께 오나라로 귀환하다 전예에게 요격당한 것입니다. 안전을 위해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게 보통이나 오나라와 공손씨는 중간에 있는 위나라의 감시와 요격을 피하기 위해 좀더 먼 바다를 통해 왕래했었는데 이때에는 늦가을이나 겨울철이라 풍랑을 피하기 위해 육지쪽에 접근해서 항해하다가 전예의 감시망에 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뒤에 손권(孫權)이 10만 군사라 칭하며 (합비의) 신성(新城)을 공격하자(※) 정동장군(征東將軍) 만총(滿寵)이 제군(諸軍)을 이끌고 이를 구원하려 했다. 전예가 말했다,

“적(賊)이 모든 부대로 대거 출군한 것은 단지 작은 이익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신성(新城)을 담보로 하여 (우리의) 대군(大軍)을 끌어들이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공성(攻城)하도록 내버려두어 그 예기를 꺾어야 마땅하고 그들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쟁봉(爭鋒)해서는 안 됩니다. 성이 함락되지 않아 적군은 필시 파태(罷怠,피로하고 나태함)해질 것이니 파태(罷怠)해진 연후에 적을 공격하면 크게 이길 수 있습니다. 만약 적(賊)이 우리의 그런 계책을 알아챈다면 [집해4] 필시 공성(攻城)하지 않고 형세상 스스로 달아날 것입니다. (그럴때) 만약 곧바로 진병(進兵)하면 적의 계책에 그대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또한 대군이 서로 상대할 때는 응당 (적군이 우리의 계책을) 알기 어렵도록 해야하며 자획(自?,스스로 계획을 꾸밈?)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전예가 즉시 이런 의견을 상소하자 천자(天子)가 이에 따랐고 때마침 적(賊)이 둔주(遁走,도주)하였다.

뒤에 오나라가 다시 침범해와 전예가 가서 이를 막으니 적(賊) 이 곧 물러났다. 제군(諸軍)이 밤중에 놀라서 외쳤다,

“적(賊)이 다시 쳐들어왔다!”

전예는 그대로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며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감히 망동하는 자는 벨 것이다.”

얼마 뒤 (알아보니) 결국 적(賊)은 없었다.


[집해4] 호삼성(胡三省,원) 왈,,우리가 적을 기다리는 계책을 쓰는 것을 알아챈다는 말.

※ 손권이 합비 신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것은 234년(청룡 2년) 5월의 일입니다. 촉한과 연결된 작전으로서 이때 제갈량은 야곡을 통해 출병해 사마의와 대치 중이었습니다.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위명제) 경초(景初: 237-239년) 말, 식읍 3백 호(戶)를 늘려 예전과 합쳐 (총) 5백 호(戶)가 되었다.

(위 제왕 조방) 정시(正始: 240-248년) 초, 사지절(使持節) 호흉노중랑장(護匈奴中郞將)으로 올리고 진위장군(振威將軍)의 직을 더하고 병주자사(幷州刺史)를 겸하게 했다. 바깥의 호(胡)가 그의 위명(威名)을 듣고 서로 뒤따르며 와서 헌상했다. 주계(州界)(→병주 경내)가 영숙(寧肅,편안하고 조용함)해지고 백성들이 그를 마음으로 따랐다.

징소되어 위위(? 尉)로 임명되었다. 여러 번 손위(遜位,지위를 사양함.사직)할 것을 청했으나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이 전예가 (비록 늙었으나 여전히) 극장(克壯,강성함)하다 하여 서신을 보내 타이르며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전예가 답서를 보내 말했다,

“나이가 70을 넘어 벼슬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는 비유컨대 종이 울리고 물시계의 물이 다하였는데도 그치지 않고 밤길을 나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죄인(罪人)(의 행동)입니다.”

그리고는 병이 위독하다고 굳게 칭하니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하고 경(卿)의 봉록을 받도록 하였다.


나이 82세에 죽었고(※) 아들 (전)팽조(彭祖)가 작위를 이었다. [2]

[2] 「위략魏略」왈, 전예가 파직하고 돌아가 (기주 위군) 위현(魏縣)에 머물렀다. 때마침 여남(汝南)에서 건보(健步,걸음이 빠른 자)를 정북(장군)에게 보냈는데 그가 전예의 옛 은혜에 감사하여 그에게 들러 인사했다. 전예가 그를 위해 닭을 잡고 기장밥을 해주고는 맥두(陌頭,길가)에까지 전송하며 그에게 말했다,

“파로(罷老,피곤하고 쇠로함)한데도 네가 힘들게 들렀구나. 도움될 바도 없는데 어찌 그랬는가?”

건보(健步)는 그가 가난하고 쇠약해진 것을 가엾게 여겨 눈물을 흘린 뒤에 떠났고 (여남으로) 돌아와 (전예의) 옛 관리와 백성들에게 이에 관해 말하였다. 여남(汝南)에서 재물(과 비단) 수천 필을 갖추어서 사람을 보내 전예에게 주었으나 전예는 일체 받지 않았다. 때마침 병들어 죽으려 하자 그의 처자(妻子)에게 분부하였다,

“나를 꼭 서문표(西門豹)의 사당 곁에 묻어 주시오.”

처(妻)가 말했다,

“서문표(西門豹)는 옛날의 신인(神人)이니 어찌 그의 곁에 묻을 수 있습니까?”

전예가 말했다,

“서문표의 이행(履行,행적)이 나와 적등(敵等,대등)하였으니 죽은 자에게 영(靈)이 있다면 필시 나와 친할 것이오.”

처자가 이를 따랐다. 여남에서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비통해하고 그의 화상(?像,초상화)을 그리고 또 그를 위해 비명(碑銘)을 세워주었다.


전예는 가평(嘉平: 249-254년) 연간에 죽은 듯한데「삼국지사전」에서는 전예가 가평4년에 죽었고 생몰년이 <171 -252년>이라고 명시해놓았습니다. 구체적인 근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전예는 청검(淸 儉,청렴) 약소(約素,검소하고 소박함)하여 포상을 받으면 모두 장사(將士,장졸)들에게 흩어주었고 호(胡), 적(狄)들이 사사로이 선물을 보내면 모두 장부에 적고 관(官)에 보관할 뿐 자기 집에 들이지 않으니 집안이 늘 가난했다. 비록 그와 다른 부류의 사람일지라도 모두 전예의 절의를 높게 여겼다. [3]

가평(嘉平) 6년(254년), (황제가) 조서를 내려 포양(褒揚,표창)하고 그의 집안에 돈과 곡식을 하사했다. 이에 관한 말은 서막전(徐邈傳)에 있다.

[3] 「위략」왈, 선비(鮮卑) 소리(素利) 등이 수차례 빈객으로 와서 만나며 여러 번 소와 말을 전예에게 선물하니 전예는 이를 관(官)으로 보냈다. 호(胡)는 예전에 전예에게 준 (소, 말 같은) 물품이 겉으로 잘 드러나므로 금(金)을 지니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몰래 금 30근(斤)을 품고 가서 전예에게 말했다,

“좌우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길 바랍니다.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

전예가 이를 따르자(사람들을 물리자) 호(胡)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제가 공(公)이 가난한 것을 보았으므로 전후로 공(公)에게 소와 말을 보냈으나 공(公)은 곧바로 관(官)으로 보내버렸습니다. 이제 몰래 이것(→금)을 공에게 올리니 집안의 재산으로 삼으십시오.”

전예는 소매를 펼쳐 이를 받고는 그 후의(厚意)에 답했다. (그리고는) 호(胡)가 떠난 뒤에 이들을 모두 바깥에 맡기고는 이런 정황을 갖추어 (조정에) 보고했다. 그러자 조서를 내려 이를 칭찬하며 말했다,

“옛날에 위강(魏絳)은 **을 열어(開懷) 융(戎)의 뇌물(예물)을 받았는데 이제 경(卿)은 소매를 들어 적(狄)의 금을 받았으니 짐은 이를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그리고는 비단(絹) 5백 필을 하사했다. 전예는 하사품을 받자 이를 나누어 그 중의 절반은 소부(小府)에 간직하고, 뒤에 호(胡)가 다시 왔을 때 (나머지) 절반은 그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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