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楚辭(초사)에 대하여 (1) | |||||
작성자 | 소위2영자장애 | 작성일 | 2013-12-28 20:19 | 조회수 | 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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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詩經)이 황하(黃河)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북방문학인데 비하여 초사(楚辭)는 장강(長江)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남방문학이다. 초사는 전국시대 굴원(屈原)을 대표로 하는 초(楚)나라 사람들이 창작한 시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것을 계승한 후대의 작품들도 모두 여기에 포함되는데, 시기적으로는 한대(漢代) 초기까지를 그 범위에 넣을 수 있다. "초사(楚辭)"의 개념은 한초에 생겨났으며, 한 성제(成帝) 때 유향(劉向)은 굴원과 송옥(宋玉) 등의 작품을 책으로 편집하여 ≪초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현재 우리에게 전하는 최초의 ≪초사≫란 책은 동한(東漢) 왕일(王逸)이 지은 ≪초사장구(楚辭章句)≫이다. 초나라는 강회(江淮) 유역 일대에서 매우 일찍부터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 은주(殷周) 문화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서주(西周) 시대에 초나라는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여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군사 정치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초나라의 패권 쟁취와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으로 남북은 문화적 교류를 달성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중원문화는 남방문화와 융합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게다가 초나라 지역에는 무풍(巫風)이 성행하여 신화전설이 풍부하였고 음악도 크게 발달하였다. "초사"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탄생되었다. 새로운 시체(詩體)로서 초사는 농후한 지역적 특색과 풍부한 상상력, 화미(華美)한 문채, 자유분방한 형식, 뚜렷한 종교적 색채, 신화전설의 대량 채용 등 남방문학의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초사(楚辭)"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송나라 때 황백사(黃伯思)가 <익소서(翼騷序)>에서, "모든 작품이 초나라 말을 썼고, 초나라 곡조를 내었으며, 초나라 땅을 기록했고, 초나라의 물건 이름을 붙였으므로 이를 초사라고 불렀다."라고 한 것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초사"는 특정한 개인에 의해서 창작되었으며, 그 내용 역시 개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개성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대표작가로는 굴원(屈原), 송옥(宋玉), 경차(景差) 등이 있으며, 회남수산(淮南水山), 동방삭(東方朔), 장기(莊忌), 유향(劉向), 왕일(王逸) 등의 한대 작가도 있다. ≪초사장구≫에는 굴원의 <이소(離騷)> <구가(九歌)> <천문(天問)> <구장(九章)> <원유(遠遊)> <복거(卜居)> <어부(漁父)>와 송옥의 <구변(九辯)> <초혼(招魂)>, 굴원 또는 경차가 지은 <대초(大招)> 이외에도, 한대의 가의(賈誼)의 <석서(惜誓)>, 회남수산의 <초은사(招隱士)>, 동방삭의 <칠간(七諫)>, 엄기(嚴忌)의 <애시명(哀時命)>, 왕포(王褒)의 <구회(九懷)>, 유향의 <구탄(九歎)>과 왕일의 <구사(九思)>가 들어 있다. 초사의 형식은 대체로 6언이 많고, 이 6언은 3언을 중복하여 사용한 것이다. 또 6언을 중복하여 1연을 이루는데, 1연의 중간에 "혜(兮)"자를 넣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조구(造句) 방면에서도 6언이 많다고는 하지만, 시경에 비해서 그 형식이 매우 자유롭다. 1. 굴원(屈原) 굴원(BC 339 ? ~ BC 278 ?)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그에 대한 사적은 ≪사기(史記)≫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에 대략적으로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굴원은 초나라의 왕족과 동성(同姓)으로 몰락한 귀족 출신이며, 이름은 평(平), 자는 원(原)이라 한다. 그는 일찍이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매우 풍부한 학식과 큰 정치적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한때는 좌도(左徒)를 역임하여 안으로는 국사를 도모하고 밖으로는 제후들을 응대하면서 대내외적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여 초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외교적으로는 제(齊)나라와 연합하여 진(秦)나라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초나라의 부패한 귀족과 진나라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그는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던 초나라의 상관대부(上官大夫) 근상(靳尙), 자란(子蘭) 등과 진(秦)나라의 첩자 장의(張儀)의 참소와 농간으로 끝내 회왕(懷王)의 버림을 받아 추방당했다. 회왕 말년에 군사 외교적으로 실패한 후에 회왕은 다시 굴원을 불러들였다. 그후 굴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왕은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경양왕(頃襄王) 때 굴원은 다시 간신들의 모함으로 강남으로 추방되었다. 이렇게 간신 무리에 의해 궁지로 내몰린 굴원은 초나라의 앞날과 임금을 생각하며 자신의 불운을 한없이 한탄하다가 결국 호남(湖南)의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약 2000여년 동안 중국인들은 위대한 애국시인 굴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五節)에 용주(龍舟)를 젓고 쫑즈(粽子)를 먹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굴원에 대한 애도를 표시하고 있다. 왕일의 ≪초사장구≫에 의하면 굴원의 작품은 <이소>, <구가>, <천문>, <구장>, <원유>, <복거>, <어부> 등 7편이 있다. 그러나 굴원이 지었다는 작품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이설이 있어 왔으며, 후세 사람들의 고증에 의거해 앞의 네 작품(<이소> < 구가> < 천문> <구장>)을 그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이소>는 굴원 자신의 신세와 임금에 대한 충정을 노래한 것이고, <구가>는 고대의 무가(巫歌)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천문>은 그가 실의하여 산천을 방황하다가 하늘을 보고 탄식하며 부르짖은 노래이고, <구장>은 강남의 들로 쫓겨난 뒤 군왕을 생각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지은 것이다. 출저: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3&dirId=307&docId=402209&qb=6rW07JuQIOq1rOqwgA==&enc=utf8§ion=kin&rank=5&search_sort=0&spq=0&sp=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