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屈原(굴원)에 대하여 (6) -3 | |||||
작성자 | 소위2영자장애 | 작성일 | 2013-12-28 20:01 | 조회수 |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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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이 시에 등장하는 어부는 당시의 隱士(은사)였다고 전해지나 사실은 굴원이 이러한 인물을 假設(가설)하여, 자기의 절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삼았다고 생각되어 진다. 또한 굴원 자기 자신의 글인지도 확실치 않으며, 아마도 굴원에 관한 傳誦(전송)을 후세 사람이 그의 작품 집에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이 글에는 그의 성격이 진실되고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가 멱라수 에 빠져 죽을 것을 예언한 듯한 구절도 보이는 데 , 그처럼 청렴 결백한 사람이니까 , 당연히 세상에 용납되지 않았고,그 자신도 亡國(망국)의 참상을 참아 *지 못하여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어부와 같은 처세는 그 때와 같은 난세에는 타당한 것이었겠지만 ,굴원의 충성스러운 심정으로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이 전이 그가 후세의 사람들한테서 愛慕(애모)와 동정을 받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dia_bluve.gif 이해와 감상 2 굴원은 초사(楚辭) 문학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초사란 초인(楚人)의 노래란 뜻으로 굴원의 "이소(離騷)", "구가(九歌)", "천문(天問)", "어부" 등이 초사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굴원의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리만큼 애절한 전조를 담고 있어 우리 나라의 고전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서포 김만중이 정철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굴원의 "이소"에 비긴 점은 당시의 문인들이 굴원의 작품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사실이다. 굴원은 너무나 청렴 결백했기 때문에 참소를 당해 멀리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상수(湘水)가로 추방을 당했다 우수에 잠겨 헤매고 있을 때 그는 어부를 만났다. 어부는 굴원에게 세상에 순응해 살아갈 것을 권했으나 굴원은 더러운 세상과 타협해 살아가느니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는 것이 낫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랬더니 어부는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으련만 물이 흐려서 발이나 씻으리.'라는 "창랑가"라는 노래를 부르며 사라져 갔다는 내용이다. 끝내 울분을 참지 못하여 멱라수라는 물에 몸을 던졌던 굴원의 깨끗하고 강직한 성품이 어부의 삶의 자세와 대조되어 더욱 빛나고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이 작품은 굴원과 어부의 대화 형식으로 짜여져 있으며, 이를 통해 굴원의 고결하고 강직한 성품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dia_bluve.gif 이해와 감상 2 굴원(屈原)이 쫓겨나, 강호에서 노닐며 못 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조릴 적에 안색은 초췌하고 모습은 수척해 보였다. 어부(漁父)가 그를 보고 물었다. "선생은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니십니까?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셨습니까?" 굴원(屈原)이 대답하기를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있는데 나만이 홀로 깨어 있으니, 이런 까닭에 쫓겨나게 되었노라." 어부(漁父)가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세상사물에 막히거나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따라 변하여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탁하면 왜 진흙탕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뭇 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다면 어째서 술지게미를 먹고 박주(薄酒)를 마시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처신하여 스스로 쫓겨남을 당하게 하십니까? 굴원(屈原)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冠)을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하였소. 어찌 결백한 몸으로 더러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차라리 소상강(瀟湘江) 강물에 달려들어서,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어찌 결백한 몸으로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소?" 어부(漁父)는 빙그레 웃고 뱃전을 두드리고 떠나가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으면 되고, 창랑(滄浪)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면 되는 것을!" 그리고는 떠나가서 다시는 함께 이야기하지 못하였다. dia_bluve.gif 심화 자료 circle01_blue.gif 굴원(屈原/BC 343 ?~BC 277 ?)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비극 시인으로 초(楚)의 왕족과 동성(同姓). 이름 평(平). 원 자. 생몰연대는 기본자료인 《사기(史記)》 <굴원전>에 명기(明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설이 있으나, 지금은 희곡 《굴원》의 작자인 궈모뤄[郭沫若]의 설에 따른다.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였으나 법령입안(法令立案) 때 궁정의 정적(政敵)들과 충돌하여, 중상모략으로 국왕 곁에서 멀어졌다. 《이소(離騷)》는 그 분함을 노래한 것이라고 《사기》에 적혀 있다. 그는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파(合縱派)였으나, 연형파(連衡派)인 진나라의 장의(張儀)와 내통한 정적과 왕의 애첩(愛妾)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은 제나라와 단교하고 진나라에 기만당하였으며, 출병(出兵)하여서도 고전할 따름이었다. 진나라와의 화평조건에 따라 자진하여 초나라의 인질이 된 장의마저 석방하였다.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굴원은 귀국하여 장의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왕의 입진(入秦)도 반대하였으나 역시 헛일이었다. 왕이 진나라에서 객사(客死)하자,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자란은 아버지를 객사하게 한 장본인이었으므로, 굴원은 그를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다. 출저: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hanmun/gul-won.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