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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간디 
작성자 하사1희귀동물 작성일 2010-03-05 21:05 조회수 248

[유형1]

 

모한다스 카란찬드 간디1869년 10월 2일 - 1948년 1월 30일)는 인도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인도의 화폐인 루피의 초상화에서도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생애
간디는 인도 항구도시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으며, 일곱살때 아버지가 수상으로 부임한 라지코트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배움은 없었으나, 아들의 말을 믿어주고 배려하는 분이었으며, 어머니는 힌두교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다. 열 세살이 되던 해에 부모의 뜻에 따라 카스톨바이와 결혼했으며, 1887년 열 여덞살때 사밀러스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 아버지 친구의 충고로 영국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1891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라지코트와 봄베이에서 변호사생활을 하던 그는 일년간의 계약으로 남아프리카의 인디아계 상사에서 근무하기로 하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생활은 간디가 백인들에게 차별당하는 동족들을 보게 했다.


 업적
그는 일생 동안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폭력을 거부했는데, 그의 비폭력주의는 나라 안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18년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 역할을 맡은 것을 전후로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서면서, 간디는 인도의 상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 또 그 때부터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 (Mahatma)로 불리게 되었다. 간디 자신은 이런 명예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마하트마 간디로 불린다.


비판
간디는 활발한 사회운동을 했지만, 노동자들에게 간디는 기득권층을 위한 지식인에 불과했다. 실례로 그는 1917년 파업권이 없는 노동조합 결성지원을 자본가들에게 제의해서 인도 구자라트 주의 노동운동을 침체시켰다. 이는 활발한 노동운동으로 권리를 쟁취해 간 봄베이의 노동자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또한 1935년 가족임금제도(가족중 한 명이 실직시,다른 가족의 임금을 인상)를 받아들여, 여성과 노인노동자들이 해고당하게 하는 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일하지 못했다. 제 1차 세계대전 때에는 인도의 전쟁가담을 주도했는데,이는 그의 비폭력주의와는 모순되는 모습이다.

 

 

[유형2]

1869년 10월 2일, 인도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나다.
1876년 7세 온 가족이 라지코트로 이사하다.
초등 학교에 들어가다.
1881년 12세 중학교에 들어가다.
1882년 13세 카스투르바이와 결혼하다.
1885년 16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다.
1888년 19세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가다.
1891년 22세 변호사가 되어 인도로 돌아오다.
1893년 24세 남아프리카로 가다.
변호사일을 하며 인도 사람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힘쓰다.
1894년 25세 나탈 인도 국민 회의를 만들다.
1896년 27세 인도로 돌아와 남아프리카에서 고통받고 있는 인도인들의 실상을 알리 는 연설을 한뒤, 다시 남아프리카로 가다.

1906년 37세 '아시아 인 등록법'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다.
1915년 46세 인도로 돌아와 아마다바트에 협동 농장 '아시람'을 세우다.
1919년 50세 영국 상품 불매 운동을 벌이다.
1930년 61세 '소금법'에 반대하는 소금행진을 벌이다.
1942년 73세 '영국은 즉시 인도를 떠나라.'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끌다.

1946년 77세 영국이 인도의 독립을 승인하다.
1948년 79세 힌두 교도와 이슬람 교도의 싸움을 막기 위해 단식을 하다.
1월 30일, 암살당하다.

우리는 간디를 가리켜, 흔히 마하트마 간디라고 부릅니다. 마하트마란 '위대한 영혼'이라는 인도말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간디에게 인도 사람들이 붙여 준 것입니다. 간디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오직 평화로운 방법으로 영국의 총칼에 맞서 싸운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아버지의 용서가 일깨워 준 '사랑의 힘'
간디의 조국 인도는, 간디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간디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폭력을 쓰지 않고 영국 스스로 잘못을 꺠닫게 하는 '사티아그라하'운동을 펼쳤습니다. 간디는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 비폭력' 의 교훈을 얻었습니다.
어린 시절, 간디는 힌두 교에서 금하는 고기를 몰래 먹기도 하고, 남의 돈을 훔친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간디가 자기의 잘못을 글로 써서 아버지에게 드리자, 아버지는 뜻밖에도 눈물을 흘리며 간디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날 아버지가 흘린 눈물은 간디에게 사랑의 힘을 일꺠워 주었고, 그것은 뒷날 간디의 비폭력 정신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남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무렵, 영국 사람들이 다스리던 남아프리카는 인종 차별이 매우 심했습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 사는 인도 사람들을 노예처럼 만들려는 남아프리카 정부의 '아시아 인 등록법'에 맞서 끈질기게 싸운 끝에,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20년 동안이나 인도사람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싸운 간다는, 인도로 돌아와 독립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간디는 인도 옷을 입고 손수 물레를 돌리며 영국에 대한 비협조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특히 영국이 만든 '소금법' 에 반대하여 벌인 '소금 행진'은, 인도 국민들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간디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고 피를 흘린 대가로 마침내 인도는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쪽으로 갈라진 독립이었습니다. 간디는 갈라진 나라를 통일하기 위해 단식 까지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한 힌두 교도 청년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Ps . 비폭력주의  배워야  하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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